2002년, 그 해 여름
박지성의 인생의 또 다른 전환점.
2002. 6.4 폴란드전을 시작으로
48년 만에 거둔 월드컵 첫 승리.
한국 축구사에
길이 남을 기록의 시작.
세계 축구의 변방이었던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은
4강 신화의 전설이 되었다.
■ 박지성의 국가대표 자격논란
최종 엔트리가 초미의 관심사였던 당시,
언론의 공격 1순위 대상이 되었던 신예 박지성.
하지만, 나는 될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 이유는 스스로는 이미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던 상태였다고 한다. 사람들이 의심하고 또 의심해도
자기 스스로는 증명하고 또 증명하겠다는 강한 믿음이 있었다.
오히려 자신의 고민은 월드컵에서
선발출전이 가능할지가 고민이었다고 한다.
박지성은 당당히 23인 엔트리에 선발되었고
포르투갈전에서 16강을 결정짓는
환상적인 골을 기록하게 된다.
박지성은 운명의 포르투갈전 결장?
박지성은 4일 먼저 치른 미국전에서 왼쪽 발목에 부상을 당했다. 발목이 완전히 돌아간 상황이라 포르투갈전까지는 회복이 가능할지 불투명한 상태였다고 한다.
보통 발목이 돌아가게 되면
최소 1주~2주의 휴식기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경기당일 눈에 띄게 호전된 발목상태로
박지성은 극비리로 마지막 테스트를 위해서
팀 코치들과 함께 인천문학경기장으로 갔다고 한다.
극비리로 진행되었던 이유는 상대팀은 박지성이
부상으로 인해 경기출전이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이 되어야 팀 전체적인 전술적으로 도움이 때문이다.
운명처럼 부상의 위기를 딛고 출전한
포르투갈전에서 박지성은 부상당했던
왼쪽 발목으로 골을 넣게 된다.
마치 운명과도 같이.
박지성은 지금도 기억한다고 한다.
나 스스로 이루어낸 것이 아닌,
선수들의 투혼 그리고 명장 히딩크 감독님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들의 응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기적이라고 한다.
여기서 박지성의 인생을 바꾼
히딩크 감독의 한마디
'너는 정신적으로 훌륭한 선수이기에
앞으로 노력하면
유럽에서
뛸 수 있는 선수가 될 것이다.'
모두가 의심할 때에
나의 가치를 알아봐 준 스승과 함께
아인트호벤행으로 향하게 된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이 끝나고
K리그에서 박지성에게
백지수표 계약을 제안한 팀도 있었다고 한다.
■ 첫 유럽 진출기
쉽지 않은 적응 과정을 거쳐 겨우 익숙해진 일본을 떠나 네덜란드에 온 박지성은 확실히 다른 세상이라고 느끼게 된다.
환경, 선수들의 움직임, 잔디상태까지
모든 것이 상상 이상이었던 유럽의 축구 세계였다.
더욱이 말도 통하지 않고, 몸상태는 무릎이 안 좋은 상태이고 빨리 적응을 해야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박지성에 찾아온 부상의 늪
부푼 기대를 안고 진출한 유럽 무대.
하지만, 그의 무릎 부상이 끝내 슬럼프에 빠지게 한다.
일본에서도 문제가 있었던 무릎 부상은
MRI 검사를 진행해도 원인은 찾지 못한 채, 계속 무릎은 아프고 답답한 상황 속에 시간이 흘러
팀 닥터가 이야기한다.
'분명히 무언가에 문제가 있다. 열어보자'
그 결과, 무릎 연골 파열이라는 진단을 받고 제거하는 수술을 진행한다. 말 그대로 몸이 엉망인 상태에서 유럽으로 진출을 한 것이다.
박지성은
처음으로 공이 무서웠다고 한다.
자신에게 패스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처음으로 느껴본
축구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이었다.
교체되는 선수에게는 '박수'
투입되는 박지성에겐 '야유'
무릎부상 보다 아팠던 3만 관중의 야유!
당시 팀 주장인 반봄멜 선수가 쐐기를 박는다.
한국 선수 왜 데리고 왔냐
애써 버티고 버티던 박지성을
한방에 무너뜨린 주장의 쓴소리였다고 한다.
처음으로 박지성은 축구가 싫었다고 한다.
박지성을 데리고 온 히딩크 감독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해, 전지훈련에서
박지성과 히딩크 감독은 면담을 하게 된다.
히딩크 감독은 '일본으로부터 3개의 팀 제안이 왔다.'
'나는 너를 보내고 싶지 않다. 선택의 너의 몫이다'
박지성은 자신의 모습은 이게 아니라는 걸
스스로 느끼고 있기에 '여기서 더 해 보겠다'라는 말을 전한다.
2004년 2월 UEFA컵 페루자의 원정경기에서
그 경기에서 풀타임을 뛰고 난 뒤에 자신이 가진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고, 이후로 단 한 번도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느낀 경기는 없었다고 한다. 모든 것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히딩크 감독은
페루자 원정경기를 마치고
인터뷰에서 말한다.
원정경기에서
득점을 내주지 않은 것도
좋은 결과지만은
더 기쁜 일은
우리에게 박지성이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야유가 함성으로 바뀌다.
박지성의 진가를 알아본 관중의 야유가 아닌 응원가
'한국에서 온 미드필더, 골 머신', '위쑹빠르크'
박지성이 만들어 낸 엄청난 변화가 시작한다.
팀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표식 같았던 응원가와 함께
박지성은 오직 실력으로만 판단하는 냉철한 유럽축구의 맛보게 된다.
운명을 바꾼 한 골
04-05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2차전
PSV 아인트호번 VS AC밀란과의 경기.
PSV 역사상 처음으로 챔피언스리그를 우승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준결승 1차전에서는 2:0으로 패하게 되면서
결승진출을 위해서는 1차전보다 큰 점수차를 이겨야 하며 선제골이 가장 중요한 경기였다고 한다.
전반 9분 박지성의 이른 득점으로 결승 진출의 희망을 살린 귀중한 한골이 터지게 되었다.
당시 최고의 수비력을 자랑하는 말디니, 네스타 등
레전드급 선수들이 포진해 있는 세계적인 선수들을 제치고 단연 눈에 띄는 활약과 함께 유럽축구계를 뒤흔든 동양인 선수의 반란이기도 하였다.
이 한골과 활약으로 운명의 전화 한 통을 걸게 된다.
퍼거슨으로부터의 전화 한통
경기 후, 에이전트를 통해서 퍼거슨 감독이
박지성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다는 내용을 전달받게 된다. 당시, 30대 초반의 라이언긱스를 대신할 세대교체의 큰 그림에 박지성이 꼭 필요하다고 설득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히딩크 감독은 공식적으로 반대하였다. '네가 가고 싶은 거냐? 아니면 에이전트에서 보내고 하는 것이냐' 박지성은 히딩크 감독에게 '한번 도전하고 싶다'는 말을 전하고 맨유의 이적에 동의하게 된다.
박지성 또한 맨유만 아니었다면 생각해 볼 것도 없이
PSV에 남았을 것이라고 한다.
맨유라는 팀의 위상이 유럽축구에서
얼마나 큰지를 유럽에 가서 깨달았고,
이런 기회가 다시 또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분명히 얻는 것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는 영국으로 향하게 된다.
■ 이 글을 마치며
2편에서는 박지성의 2002 한일 월드컵의 활약과
PSV아이트호벤 첫 유럽진출 기를 다뤄보았다.
1년 동안의 박지성의 슬럼프를 이야기하면서
공감되는 내용이 너무 많다.
개인적으로 이 프로인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나에게도 슬럼프가 왔다.
처음에는 어떻게 이 상황을 헤쳐나가야 하는지 몰랐으나,
박지성의 이야기를 듣고 다시 마음을 잡게 되었다.
박지성이 5m에 있는 우리 선수에게 패스를 주는 것부터 시작했듯이 처음부터 차근차근 다시 시작을 해야 해 보려고 한다.
히딩크 감독이 박지성 선수에 가치와 믿음이 있었던 것과 같이
나 스스로에게도 믿음과 가치를 높일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오늘 이 글을 읽고 단 1명이라도 진심으로 공감해 주고 용기를 얻는 분이 있었으면 좋겠다.
3편은 드디어
박지성의 전성기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내용을 다룰 예정이다.
다음 편을 대박 기대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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